[칼럼] 청포도 익어갈 때

장영주의 파워브레인

 

▲ 그림 = 원암 장영주


장마와 함께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초복을 필두로 뜨거운 햇살과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생명은 활짝 열리니 ‘여름’이다. 뒤따라 열매로 갈무리하는 ‘가을’이 올 것이고 힘에 겨운 ‘겨울’이 되면 자연은 쉬면서 다시 채비를 한다. 

언 땅 풀리고 산수유, 진달래, 철쭉, 나물, 쑥부쟁이, 아지랑이, 꽃과 나비, 뻐꾸기, 소쩍새, 후투티... 이것저것 볼 것 많아진 ‘봄’이 뒤따를 것이다. 

인간사 꼬인 실타래처럼 어지럽지만 하늘의 법도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어김없이 돌아간다.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내 고장 청포도’는 그렇게 여름 내내 익어간다.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경북 안동 출신이다. 아버지 ‘이가호’는 퇴계 이황의 13대손으로 원록은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다. 어머니 ‘허길’은 구한말의 위대한 의병장 ‘허위’의 손녀이다. 형제들은 역시 독립 운동가인 외삼촌 ‘허규’에게 어릴 적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원록’이 17살이 되던 해, 조선은 결국 일본에 병탄되고 형 ‘원기’ 아우 ‘원유’ 삼형제는 대구에서 의열단에 함께 가입한다. 1927년, 24세의 ‘원록’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투옥된다. 그때의 수인번호가 264번이다. 

그 번호인 ‘2. 6. 4’ 를 ‘이육사(李陸史)’라는 필명으로 승화시켜 운명할 때까지 애용한다. 고통의 상징을 오히려 창조의 상징으로 삼은 것에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의 맑고도 강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이육사’는 광주학생운동, 대구 격문사건 등에도 연루되어 무려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른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을 지속한다. 1943년 가을 서울에서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고 다음해 1월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다. 

그는 한갓 문약한 시인이 아니었다. 이육사(李陸史)’라는 이름 속에는 ‘대륙(陸)속에 한민족의 역사(史)를 바로 세우겠다.‘는 웅혼한 뜻이 심겨 있다. 광야로부터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의 꿈이 청포도처럼 알알이 입력되어 있다. 

그의 시들은 뼈를 깎아, 피를 찍어 쓴 생명의 노작들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시 어디 한 군데에도 피내음, 원망 등으로 복수의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감번호를 오히려 시인의 필명으로 승화시킨 육사의 창조세계는 아득히 높은 자연 그 자체이다. 시인은 ‘목숨 걸고’ 독립 운동을 이어갔지만 마음은 ‘하얀 모시’처럼 한없이 순수하였다.

육사의 외동딸 이름은 ‘이옥비(李沃非)’이다. ‘옥비’는 결코 ‘비옥하고 기름지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독립지사요 시인인 아버지의 간절한 염원이 실려 있다.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내 골방’에서도 뜨겁게 독립을 이루어 가던 아버지시인이었다. 춘풍처럼 자애롭고, 추상같이 엄격한 육사의 비원이 ‘옥비’라는 이름에 오롯이 살아 숨 쉰다. 

이옥비님은 아버지께 "네가 할 일을 꼬박꼬박 해냈구나.“라는 칭찬을 가장 듣고 싶다고 한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께서는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고 권하신다. 이로써 ‘그 어머니에 그 아들(是母是子)’이라는 말씀을 역사에 새기셨다. 

이육사는 ’그 아버지에 그 딸(是父是女)‘라는 금과옥조를 남긴 셈이다. 이런 분들이 겨레의 ’영원한 어머님, 아버님’이신 것이다. 신산고초의 시대조차 뜨거운 꿈과 사랑으로 나날을 채워 간 선현들의 마음 앞에 이제는 국민들도 투명해져야 한다. 

지구촌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살육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분쟁, 중국의 군비증강, 미국 대선의 향배, 불확실한 국제상황, 첨예해져만 가는 남북관계와 혼탁한 국내 갈등...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우리들의 나라’를 잃는 다면 ‘내 가족’도 ‘모두의 지구’도 허망하게 잃고 말 터이다. 그 참극 앞에 그 어떤 구원과 그 어떤 영광이 따로 존재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백마 타고 오는 ‘광야의 초인’을 기다리지 말자. 어떤 역경 속에서도 ‘나와 민족과 지구’를 진심으로 돌보고 사랑하는 존재로 스스로 진화하자. 

모두를 다살(스)리는 드높은 가치를 널리 세우는 사람이 초인인 것이다. 그때 하늘의 법도와 땅의 사랑으로 알알이 무르익은 가을이 뭇 생명을 팔 벌려 껴안을 것이다. 

글. 원암 장영주 사)국학원 상임고문,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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