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의 정의에 영적 차원을 포함하자는 제안
‘WHO 영적 건강’으로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WHO(세계보건기구)의 헌장에 영적 건강이 포함되었다고 소개하는 글들이 가끔 보입니다. 아마도 1998년 언론에서 WHO 집행이사회에서 헌장 수정안에 대해 협의한다는 보도를 내고는, 이듬해 보건 총회에서 보류되었다는 후속 기사가 나지 않아서 발생한 일인듯 싶습니다.
그래서 한번 차근차근 짚어봤습니다. 유엔의 건강보건분야 전문기구인 WHO는 1948년 창설 당시 WHO의 헌장 전문에 건강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Health is a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건강은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차원의 건강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상태라는 것이죠. 아직 일반 의료계에서는 병을 몸의 문제로만 접근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시각의 전환이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WHO의 헌장을 개정해서 건강의 정의에 영적 차원을 포함하자는 제안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21세기를 앞두고 현재의 건강 개념이 여러 가지 한계를 갖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죠.
“몸과 마음, 영혼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통합적 접근이 건강을 가져올 것”
건강에 대한 통합적 접근의 필요성을 활발하게 알린 전문가 그룹 중에 국제통합건강협회(IHHA, Internatioanl Holistic Health Association)가 있습니다. 이들이 WHO에 공식적인 파트너십을 지원하면서 몸과 마음, 영혼을 포함한 통합적 접근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죠.
“현대 의학의 성과가 자랑스럽긴 하지만, 지금은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영역들을 자각하고 좀 더 나은 패러다임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인류에게는 셀프 힐링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많습니다. 경험적으로 그 효과가 증명된 이러한 방법들이 이제는 좀 더 과학화되어 건강과 질병의 통합적 접근에 활용되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 영혼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통합적 접근이 우리 국가에 건강을 가져올 것입니다.”
또 한 축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식민지에서 독립해 유엔의 회원국으로 참여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입니다. 특히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적극적으로 WHO의 건강의 개념에 영적 건강을 포함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쿠웨이트의 대표가 1983년 WHO 보건 총회에서 한 발언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도, 인류는 삶의 영적인 면을 돌보지 않는 한 계속해서 길을 잃고 불안할 것입니다. 인류의 건강을 책임지는 우리는 인류가 더 이상 공허함과 무력감 속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WHO의 정책에 영적 측면을 반영해야 합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미국 중심의 지정학적, 문화적 세계질서를 비판하면서 자국의 종교적 전통이 국민의 건강 증진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자 했던 것이죠. 1998년 WHO 집행이사회의 협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보건 총회에 건강의 정의 수정안이 제출되었습니다.
“Health is a dynamic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spiritu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spiritual’이라는 말과 함께 ‘dynamic’이 추가되었습니다. 일본의 보건학자인 마사코 나가세는 이를 두고 ‘개인의 건강은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한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역동적인 과정에 초점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영적 건강’ 채택이 기약 없이 보류되고 있는 이유
1998년 집행이사회가 개최될 당시 우리나라 언론은 “건강에 대한 세계보건기구의 정의가 50년 만에 극적으로 수정될 전망”이라면서, 이 수정안이 통과된다면 국제적으로 상당한 파급효과가 예상된다고 보도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당시 보건의료관리연구원장인 신영수 교수가 대표로 참석했는데, 이 수정안에 대해 한국은 1999년 103차 집행이사회에서 재논의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변경된 정의가 가져올 영향에 관해 정책 전문가, 학계, 산업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였죠.
수정안은 1999년 보건 총회에 상정되어 투표 후 채택될 예정이었지만 투표 자체가 기약 없이 보류되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의학 전문가로 총회에 참석한 마노지 쿠리안Manoj Kurian은 이후의 회고에서 당시 서유럽 국가들의 대표들이 강하게 반대했다면서, 자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던 대규모 영적 운동을 경계하던 유럽 국가들을 의식해 회원국 간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 WHO가 전략적으로 투표를 보류했다고 봤습니다.
당시 서유럽에서는 기존의 종교적 전통과는 다른 형태의 영적 탐구와 자기 계발을 추구하는 영성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뉴에이지 운동, 대체의학과 에너지 치유 등의 영성적 치유, 자아초월심리학, 명상 그룹 등이 있었고 이러한 운동들이 때때로 종교적 전통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WHO의 가장 큰 기부 국가인 미국도 이 논의에 거리를 두었습니다. 이에 대해 WHO의 고위 관리자였던 데릭 야크Derek Yach는 “아마도 건강에 ‘영적’이라는 단어를 포함했을 때 어떤 법적 문제를 함축하고 있는지가 명확해질 때까지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데, 이 수정안이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제한하게 될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WHO의 건강환경 분야를 총괄했던 윌프레드 크리셀Wilfred Kreisel은 서구의 국가들과 아랍/아시아 국가의 인식 차이를 지적합니다. 근대 종교혁명을 겪으면서 유럽과 미국의 국가들에서는 건강 문제에 종교가 개입할 공간이 없기 때문에, 건강의 영적 차원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영성과 종교는 어떻게 다른가
영적 건강이 WHO의 헌장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기에 건강과 삶의 질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측정하기 위해 WHO에서 개발한 도구 WHOQOL에 개인의 영적, 종교적, 그리고 개인적 신념 영역이 추가되었습니다. WHOQOL은 신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독립 수준, 사회적 관계, 환경, 영적/종교적/개인적 신념 이렇게 여섯 가지 핵심 영역에서 건강 관련 삶의 질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WHOQOL-SRPB를 별도로 추가함으로써 건강과 삶의 질을 평가하는 요소로 영적인 영역을 좀 더 구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SRPB는 영성(Spirituality), 종교(Religiousness), 개인의 신념(Personal Beliefs)의 영문 각 단어의 앞 글자를 딴 것입니다. WHOQOL-SRPB 모듈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연구와 임상 환경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WHO는 WHOQOL-SRPB를 개발 관련 문서에서 인간을 기계론적, 물질적 존재로만 접근하는 관점이 한계에 다다랐다며, 건강과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 요소의 가치를 인정하고 심신의 연결과 비물질적 차원을 강조하는 통합적 관점으로 연구하게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종교와 영성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혼란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문서에서 WHO는 WHOQOL-SRPB의 개발 지침으로 종교와 영성의 의미와 차이를 정리했는데,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성이란 삶에는 우리가 인식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따라서 삶에는 비물질적 속성이 있다는 믿음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영성은 삶의 의미나 목적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것으로 어떤 특정한 종류의 믿음이나 방법에 국한될 필요는 없습니다.
반면 종교는 사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 영적인 속성을 인간에게 부여해 준 초자연적인 존재, 우주의 창조자이자 우주의 주관자의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영성과 달리 특정한 예배의 형식과 교리가 있습니다.’
WHO 헌장에 ‘영적 건강’이 명시적으로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영적 건강과 삶의 질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해 들여다봐야 하는 영역으로 인정한 셈입니다.
영성은 이론보다 활동, 교리보다 생활 방식, 믿음보다 실천에 관련된 개념
앞으로 인류가 영성과 영적 건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라며, 영성과 종교의 차이를 잘 개념화한 영국의 저명한 종교철학자 존 코터John Cottingham 교수의 글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Spirituality has long been understood to be a concept that is concerned in the first instance with activities rather than theories, with ways of living rather than doctrines subscribed to, with praxis rather than belief.”
“영성은 오랫동안 이론보다는 활동에, 교리보다는 생활 방식에, 믿음보다는 실천에 관련된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출처 : The Spiritual Dimension: Religion, Philosophy and Human Value)
글_김지인 국제뇌교육협회 국제협력실장. jkim618@gmail.com
참고자료_Peng-Keller, Simon et al (2022). The Spirit of Global Heal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