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한 번이라도 트라우마를 겪을 확률
사람은 큰 사고나 자연재해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공포감을 느끼고 정신적으로 외상을 입을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 외상이 흔히 말하는 ‘트라우마’다. 평생 한 번이라도 트라우마를 겪을 확률은 50퍼센트 이상이며, 가까운 사람의 죽음까지 포함한다면 80퍼센트가 넘는다.
전쟁에 나가 싸우거나, 우즈베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분쟁 지역에 거주해야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건 아니다. 트라우마는 가족, 친구, 이웃 등 주변 환경으로 인해 생길 수도 있다.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전쟁이나 자연재해 같은 무수한 재앙을 겪었지만, 뛰어난 회복 능력으로 다시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35년간의 일제 강점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상처로 남아 있고, 6.25 전쟁,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까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겪은 일들이 몸과 마음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위협이 되는 사건이나 상황이 트라우마의 원인이라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는 그 결과다. 통상 트라우마가 일주일 넘게 지속되면 ‘급성 스트레스 장애’, 한 달이 넘으면 PTSD 진단을 내린다.
국가트라우마센터에 따르면 PTSD의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불쾌한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오름 ▲트라우마를 연상시키는 상황이나 사람 등을 회피하려고 함 ▲부정적인 생각이 지속됨 ▲작은 일에도 깜짝 놀라거나 숨이 가쁘고 심장이 빨리 뜀 ▲집중력이 떨어짐 ▲불면증이 생김 등이 포함된다.
이태원 참사 이후 통합심리지원단을 통해 2023년 진행된 심리 치료 7,108건
충격적 사건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르다. 똑같이 충격적인 사고를 당해도 어떤 사람은 일정 시간이 지나고 필요한 도움을 받으면 회복되어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불안, 우울감,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PTSD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반드시 전문가의 상담과 의학적인 치료를 받아야 한다.
트라우마는 그 일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사람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면 아내도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향이 나타나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불안감이 높을 가능성이 크다.
어릴 때 가족 안에서 신체적•언어적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성인이 되어도 타인과 안정적인 관계를 맺기 어려워한다. 성폭력 희생자, 참전 군인, 재난이나 참사를 겪은 사람들은 대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기억, 당시에 느꼈던 공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수치심을 억누르고 외면하면서 일상을 유지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들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2022년 이태원 참사 발생 이후,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위한 통합심리지원단 지원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트라우마 증상을 호소하며 심리 치료를 받은 건수는 7,108건이었다. 또한, 행정안전부와 교육부가 진행한 심리지원 건수는 각각 1,330건, 2,642건으로 많은 사람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다음과 같은 증상이 두 가지 이상 한 달 넘게 지속되면 트라우마가 PTSD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PTSD는 불안장애와 같은 정신적 질환 외에도 당뇨병이나 고혈압 등 신체적 질병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 사건에 관한 악몽을 꾸거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도 떠오른 적이 있다. • 외상 사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다. • 늘 주변을 살피고 경계하거나, 쉽게 놀란다. • 다른 사람이나 일상 활동, 또는 주변 상황에 대한 느낌이 없어지거나 멀어진 느낌이 든다. • 외상 사건으로 인해 생긴 문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을 멈출 수가 없다. 출처_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 |
트라우마는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재경험’하는 것
신경과학자 폴 매클린Paul Maclean은 인간의 뇌 구조를 진화학적 관점에서 ‘삼위일체 뇌’로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뇌간’, 중간의 ‘변연계’, 바깥쪽 ‘대뇌피질’의 구조를 갖고 있다. 뇌는 발생기에 아랫부분부터 만들어진다. 뇌간은 호흡, 체온 조절 등 생존에 꼭 필요한 기능을 담당하며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발달한다.
변연계는 기억, 감정을 담당하며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 후부터 발달하기 시작한다. 변연계에서 감정 조절에 가장 핵심적인 기관은 해마와 편도체이다. 해마는 기억과 경험을 처리하는데 보통 장기기억을 저장한다. 해마에 저장되지 않는 강한 정서를 동반한 기억들은 우리 몸과 편도체에 저장된다.
미국 보스턴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교수 베셀 반 데어 콜크Bessel Van Der Kolk는 편도체를 화재경보기에 비유했다. 불이나 연기 같은 위험을 감지해 화재경보기가 알람을 울리듯, 편도체는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 중 생존에 위협이 되는 것이 있는지를 감지하고, 이를 몸과 뇌에 신호를 보내 대처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화재경보기가 실제 화재로 인한 연기인지 담배 연기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편도체 역시 위험을 감지할 때 그것이 정말 생존에 위협이 되는지 아닌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우리 몸과 뇌에 똑같이 신호를 보낸다.
공황장애 환자들이 전혀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편도체가 오작동해 사소한 자극에도 위험 상황으로 인식해서 몸과 마음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처럼 트라우마는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끔찍했던 상황을 현재에도 ‘재경험’하는 ‘플래시백Flashback’이라 할 수 있다.
진화적으로 가장 늦게 발달한 대뇌피질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이성과 사고를 관장한다. 특히 전두엽은 계획하고 예측하며, 시간과 상황을 인지하고, 부적절한 행동을 억제하고, 타인에게 공감하는 기능을 한다.
어떻게 보면 전두엽만 잘 작동한다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엽을 포함한 대뇌피질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강력한 감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안전한 상황에서는 전두엽이 변연계와 뇌간을 통제하지만, 생존을 위협받으면 뇌간과 변연계가 앞장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작동한다.
충분한 심리지원이 가능한 사회 시스템 마련이 우선돼야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후에는 이전과 다른 신경계로 세상을 경험한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은 내면에 발생한 혼돈을 억누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뇌가 본능적으로 일으키는 심리적 반응을 통제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온갖 신체 증상을 유발해 섬유 근육통이나 만성 피로, 기타 자가면역 질환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 지속적인 스트레스 반응이 사라지고, 심신이 안정된 상태로 회복되어야 비로소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에게 ‘언제까지 그 상황에 빠져 있을 거냐’, ‘빨리 극복해야 한다’는 말은 오히려 상처가 된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거나 지켜봐야 하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도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렇다고 상황을 묻어두거나 회피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건강하지 않은 방법이다.
자신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를 다른 누군가가 진심으로 공감해 준다면 아픔이 줄고 극복할 용기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역할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대형 재난을 겪은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는 단기간의 심리지원이나 개인적인 노력으로 회복되기 어렵다. 트라우마에는 정해진 유효기간이 없으므로 충분한 심리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안이 우선되어야 한다.
글_전은애 수석기자 insight1592@gmail.com
참고 도서_《몸은 기억한다》 베셀 반 데어 콜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