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인트레이닝] 우리가 친절해야 하는 이유

뇌로 보는 세상

브레인 102호
2023년 12월 25일 (월)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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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3월, 확장판 버전으로 재개봉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포스터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빛나는 하나의 진실  

여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택시를 탔다. 고향을 떠났고, 미국으로 이민 후 세탁소를 열었고, 딸을 낳았다. 평생을 온 힘을 다해 살아내는 데 바쳤다. 어느새 중년이 된 여자는 어느 날, 고통스러운 세무  조사를 준비하며 노쇠한 아버지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동성애자인 딸과 갈등하는데 남편은 이혼 서류를 내민다. 그때 마침 여자에게 멀티버스가 열린다. 

지난해 미국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는 주인공 에블린이 멀티버스 안에서 수천, 수만 개의 삶을 살아가 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나며 그 모든 능력을 빌려와 세상과 가족을 구하는 이야기이다. 

세무조사관 앞에서 노래방 기계 구입 비용이 왜 세탁소 운영에 포함됐는지 설명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서 남편 웨이먼드는 평소와 달리 범상치 않은 목소리와 눈빛으로 “우리 모두가 멀티버스에 살고 있으며, 지금 바로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많은 ‘나’들로부터 힘을 빌려 세상과 가족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 에블린과 그의 가족들


에블린은 다중 우주에서 영화배우가 되기도 하고 가수, 요리사가 되기도 한다. 다양한 선택지에 따라 에블린은 손가락이 핫도그인 우주에 살기도 하고, 인간의 형태에서 벗어나 장난감, 돌 등의 물체가 되기도 하며, 3차원 영역에서 벗어나 2차원의 평면 속 그림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다중 우주 속의 ‘나’ 는 인간일 것이라는 편견과 한계를 넘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나의 에블린, 난 당신을 알아. 늘 뭔가 이룰 기회를 놓쳤을까 전전긍긍하지. 이 말을 해주러 온 거야.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하는 대사)
 

<에에올>은 멀티버스를 신선하게 해석했다. 다중 우주 세계관 속에서 에블린은 ‘버스 점프verse jump’를 통해 다중 우주 속 여러 에블린의 능력을 현재로 끌어와 싸우거나, 아예 다른 우주로 이동하며 그 속에서 직접 선택을 하기도 한다. 현재의 에블린은 인생의 갈림길마다 최악의 선택을 해 아무 능력도 없는 가장 ‘하찮은’ 인생을 살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다양한 능력 을 흡수하며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거듭난다. 
 

“모든 게 부질없는 거면 살면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괴로움과 죄책감이 사라지잖아.”  
(조부 투파키의 대사)

영화에서는 아무 능력도 없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빛나는 가능성을 가진 에블린이 있다면, 모든 것을 알고 깨우쳐 허무에 빠진 빌런 ‘조부 투파키’라는 존재가 있다. 알파버스에서 과도한 실험으로 다중 우주 속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느 세계든 이동할 수 있는 절대적 존재가 되지만, 그렇기에 투파키는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우주에서 모든 경험을 하는 동안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그는 베이글(베이글 모양의 블랙홀) 위에 세상 모든 진실(everything)의 조각을 올려둔 채 절대 고독 속에 빠져 다중 우주를 파괴하려 한다.

에블린은 다른 세계로 점프하며 최고의 영화배우가 되기도 하고, 훌륭한 셰프의 삶을 경험하기도 한다.
지금의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말대로 고향에 있었더라면 살았을 삶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에블린에게 조부 투파키는 삶의 무의미함을 말하며 가운데가 뻥 뚫린 베이글의 블랙홀로 들어가 사라져버리자고 한다. 그러나 에블린은 결국 ‘왜 현재에 머물러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는다. 바로 철없고 우유부단하다고만 생각했던 남편 웨이먼드를 통해서다.
 

▲ '버스 점프'속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삶을 살았던 에블린


웨이먼드는 문제를 피하지 않고 매 순간 진심을 다하며, 무엇보다 다정하다. 자기 가족을 괴롭히는 악마 같은 국세청 직원에게 쿠키를 가져다주고, 집과 가게 곳곳에 인형 눈알을 붙이는 장난을 하기도 한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우리 모두 다정해야 한다는 거야.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때 말이야” (웨이먼드의 대사)

웨이먼드가 가진 무기는 다정함이다. 웨이먼드는 난장판이 된 세탁소에서 국세청 직원에게 에블린의 아버지가 아프고 딸과는 갈등이 깊은데다 이혼 위기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웨이먼드의 진심 어린 고백에 국세청 직원은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며 돌아간다.

웨이먼드의 말을 받아들인 에블린은 다정함과 사랑으로 다중 우주를 파괴하려는 조부 투바키를 설득한다. 그리고 딸 조이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먼저 다가가 다정함을 건네고, 딸과 화해한다. 에블린은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며 가장 소중한 존재는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이라 는 것을 깨닫는다.
 

적자생존은 틀렸다

다윈의 진화론 하면 ‘적자생존’을 떠올린다. 인간의 경쟁적인 속성에 초점을 맞춘 개념으로 이를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종의 기원》 1859년 초판에는 ‘적자생존’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책이 출간된 지 몇 년 후, 허버트 스펜서는 <동물의 다산성에 관한 일반 법칙으로부터 추구된 인구론>이라는 논문에서 경제학 이론과 진화이론을 연결하면서 처음으로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진화론을 같이 발견한 앨프리드 윌리스가 다윈에게 ‘자연선택’을 대신할 말로 ‘적자생존’을 제안했다.

자연선택이라는 표현은 자연을 의인화하는 듯한 오해를 부른다는 것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 제5판에서 비로소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윈과 현대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적자’는 단지 번식의 성공에 관한 것이다.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는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우월한 자’가 더 잘 생존하며, 심지어 더 잘 생존해야 마땅하다는 오해를 낳았다. 이런 왜곡된 시각을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여러 정부 정책과 정치 운동이 행해지고 정당화되었다. 그럼 특정 인간을 포함한 특정 생물종이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다정함(Friendiness)’이다. 진화인류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브라이언 헤어Brain Hare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에서 다정함, 친화력, 교류와 소통을 바탕으로 한 협력이 진화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했다고 주장한다.


타인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협력하는 유전자를 지닌 인간

다정함이 진화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협력이 생겨나고, 궁극적으로 생물종의 더 큰 ‘성공’으로 이어지는 사례는 자연에서 수시로 발견된다. 꽃을 피우는 식물은 다른 대부분의식물 종보다 늦게 발생했지만, 곧 온 지구를 뒤덮고 있다. 이런 빠른 확장의 비결은 꽃가루를 옮겨주는 곤충과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육상 척추동물 중 유일하게 남극에서 1년 내내 서식할 수 있는 동물은 바로 황제펭귄이다. 황제펭귄은 남극의 혹독한 추위를 서로 ‘포옹’하며 이겨낸다. 대부분의 조류가 각자의 공간을 중시하는 것과 달리 황제펭귄은 서로 협력해 ‘따뜻함’을 얻었다.

사람은 인종마다 피부, 머리, 동공 등이 다양한 색을 띠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눈’이다. 다른 영장류들은 안구의 대부분을 싸고 있는 공막이 짙어서 눈동자의 움직임이 가려져 있다. 인간은 공막이 하얀 유일한 영장류이다. 게다가 눈의 형태도 아몬드 모양이어서 흰자위가 드러나 눈동자를 조금만 움직여도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우리 뇌에는 누군가의 눈을 볼 때의 반응을 담당하는 신경세포가 있다. 상측두이랑에 위치한 이 세포들은 편도체를 포함하여 피질하 영역의 감정중추와 연결된 신경망의 일부이다. 이 신경망은 생후 초기에 발달한다. 생후 4개월만 돼도 아기는 눈의 공막 모양에 초점을 맞추어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신경망의 신경세포들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자동으로 반응한다. 이처럼 우리의 눈은 협력적인 의사소통에 특화되어 있고, 인간의 DNA 속에는 집단 내 타인에 대해 동질감을 느끼고 협력할 수 있는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 사진_게티이미지 코리아


편협한 다정함의 이면

해외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모르는 사람임에도 반가움을 느낀다. 다른 나라에서 만난 사람이 나와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가워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통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처음 만난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은 사람에게만 있다. 집단으로서 하나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이다.

언어, 종교, 국가, 인종, 출신학교가 같은 집단끼리는 서로 교류하고 아이디어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이 같은 네트워크의 연결을 통해 기술과 문화가 급속히 발전했고, 그 덕분에 다른 종에서는 불가능했던 협력과 성공을 이뤘다.

서로 연결하는 ‘다정함’ 덕분에 인류가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었다면, 인류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과 폭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역설적으로 집단 내의 다정함은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와 적대로 작용했다. 지구상의 생물종 중에서 인간의 적은 오직 인간이다. 가족, 친구, 종교, 민족, 인종, 국가내에서만 작동하는 다정함이 더 넓은 집단을 향한 보편적 공감으로 확장될 수 있을까?
 

모두를 향한 친절과 다정함이 허무의 블랙홀을 메울 것

다시 영화 <에에올>로 돌아가서, 다중 우주 속 여러 에블린의 능력을 현재로 끌어와 조부 투파키와 싸우던 에블린은 다중 우주에서 더 부유하고 유명하고 능력 있는 에블린들이 각자의 아픔, 고민, 외로움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에블린은 버스 점프로 악당 개개인이 빌었던 소망을 들어주며 그들을 안아준다. 악당들이 세상에 좀 더 다정해질 수 있도록, 모두가 다정해져서 허무한 세상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다중 우주 속 에블린에게도 친절을 베풀고 다정함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 웨이먼드가 세탁소 곳곳에 붙여 두었던 인형 눈은 흰 공막과 눈동자가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사람의 따스한 눈길과 다정함을 의미하는 웨이먼드의 ‘인형 눈’은 결국 조부 투파키의 가운데가 뻥 뚫린 베이글을 채워준다.
 

▲ 남편 웨이먼드의 '인형 눈'을 이마에 붙인 에블린


<에에올>의 감독 다니엘 콴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영화가 불안을 다루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불안이 곳곳에 만연하다. 일상에서 너무 많은 감정과 이야기가 충돌하고, 신경을 거스르는 부정적 소식이 넘친다. 하지만 우리 영화에서 나타나는 삶의 허무함과 공허감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고 포기하지 않는 애정으로 채워진다. 나는 이 과정이야말로 사람들이 사회를 구축해온 방식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불안을 잠재우고 마음을 돌보는 좋은 방법은 그저 존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있기에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최근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소식이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한다. 허무와 슬픔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희망의 끈을 놓친 사람들과 이 넓은 우주에서 함께 살아가는 운명인 이상 서로에게 티끌만큼의 다정함이라도 보여 주었으면 한다.

글_전은애 기자 hspmak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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